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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산(大本山) 직지사(直指寺) 에 소속된 말사 가운데 수사격(首寺格) 인 불영산(佛靈山) 청암사(靑巖寺) 는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188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금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지례군(知禮郡) 에 소속되어 있었다.
증산면(甑山面) 이라는 지명이 뜻하는 바와 같이 그 위치가 깊은 산곡의 분지(盆地) 에 처하여 일반인의 접근이 용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절의 창건 역시 신라 도선국사(道詵國師) 의 건립으로 되어 있으므로 지형적 의미가 뜻하는 바 크다.
즉,청암사사적(靑巖寺事蹟)에 따르면 이 절은 이웃한 쌍계(雙溪),수도(修道) 양사(兩寺) 와 함께 신라 헌안(憲安) . 헌강(憲康) 양조(兩朝) 에 걸쳐 창건된 사찰이며, 이들은 한결같이 도선 국사의 비보사찰(裨補寺刹) 로서 전래 되었다.
대체로 청암사의 창건은 신라 헌안왕 3년(859년) 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초기에는 쌍계사의 산내암자였다. 그러다가 쌍계사가 패망됨으로써 오늘날 면사무소가 위치한 거대한 절터에는 초석(礎石) 과 석조연화문(石造蓮華紋) 등 석물만 남았고, 이곳에 있던 범종은 6.25 당시 파손되어 청암사로 옮겨졌으나 사용이 불가능하였고, 이후 1992년 1월 800관의 범종을 신조(新造) 하였다. 따라서 현재 청암사에 소속된 산내암자는 백련암(白蓮庵), 수도암(修道庵) 등 2암에 이르고 있다.
이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정조 6년(1782) 에 다시 화재를 입어 전각이 회록(回祿) 되자 환우 대사(喚愚大師) 가 다시 신궁보전(新宮寶殿) 과 누당(樓堂) 을 중건하였는데, 이를 제3차 중창이라 한다. | ||
또한 극락전이 창건되던 그해 겨울에 비구니 유안사(有安師) 가 발원하여 백련암(白蓮庵) 을 창건(1906년) 하였다. 그러다가 6년 후인 1911년 9월 21일 밤 청암사는 다시 화재를 입어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대운 대사(大雲大師) 가 화주가 되어 대중을 위로하고 독려하여 그 다음해 봄부터 다시 청암사를 재건하였다. 특히 대운 대사는 중국 강소성(江蘇省) 으로부터 석가상(釋迦像) 을 조성하여 대웅전에 봉안하는 등 전각의 장엄을 완성하였다. 이를 청암사의 제4차 중창이라 한다. 이때의 불사(佛事) 에는 비구니 유안사(有安師) 가 2,000환을 시주하였으며, 그외 서울지방에서의 많은 시주가 있었다. 현재 사중(寺中) 에 있는 극락전만일회동참대시주록(極樂殿萬日會同參大施主錄)의 현판(懸板) 을 보면 상궁(尙宮) 의 인명이 무려 26명에 달하고 있으며, 여타 대소시주록(大小施主錄) 에도 상궁의 인명이 17명이나 보이고 있다. | |
이처럼 산곡에 처한 청암사가 왕실 주변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된 데는, 아마도 숙종의 계비 인현황후가 서인으로 있을 당시 이곳의 극락전에 기거하면서 기도드렸던 인연에 기인한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도 극락전에는 별채의 건물이 있는데, 이는 인현황후를 위하여 건립된 왕실건축 양식이란 말이 있다. 따라서 청암사는 이같은 인현왕후와의 연관으로 인하여 조선시대 말기에도 상궁들이 가끔 이곳에 내려와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으로서 유명하다. | ||
당시 학승의 수는 무려 200여 명에 이르렀고, 또한 강고봉(姜高峰) 강백이 가르치던 1975년도까지만 하여도 학인이 40여 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현 주지이자 강주(講主) 인 지형(志炯) 비구니 스님이 1987년 8월 청암사승가대학을 설립하면서 진영각(眞影閣), 육화료(六和寮) 를 보수하고 부속건물인 중현당(重玄堂), 선열당(禪悅堂) 을 1992년에 신축하였으며, 1993년에는 극락전을 중수하니, 이것이 제 5차 중창으로 현재 10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 ·• 정진하는 도량으로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