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黃岳山 直指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선원

▒▒ 黃岳山 直指寺 ▒▒

직지사

천불선원전경


99년에 개원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울을 건너면 피안에 이르러 고요한속에 죽비소리만이 정적을 깨울뿐 ... 나는 새들도 숨을 죽입니다.


직지사(直指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의 본사로서 황악산(黃鶴山,해발 1111미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황악산의 '황(簧)'은 중앙을 상징하는 글자로 소백산맥의 우뚝 솟은 봉우리 하나가 경상,전라,충청3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기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 산 아래 선의 상승종위(上乘宗違)인 '직지인심 견성성불 (直指人心 見性成佛)에서 직지라는 사명을 따온 직지사가 자리를 틀고 있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阿道)화상이 창건하고 선덕여왕 14년(645) 자광 율사가 중창하였다고 하나 창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경순왕 4년(930) 천묵스님이 중수하였으며 고려조에 들어와 능여대사가 태조의 도움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등곡학조(燈谷學粗) 스님이 중수했으나 선조 29년(1596) 임진왜란 때 43동의 건물 중 천불전, 천왕문, 자하문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는 운을 겪었다. 1602년부터 70여 년에 걸쳐 중건불사를 벌여 상당한 규모를 유지했으나 1805년부터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다가 6.25동난과 정화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퇴락했다. 1958년 녹원 스님이 주지로 재직하면서 직지사는 면목을 새롭게 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1966년 이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거행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하여 오늘날 대가람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현재 직지사에는 쌍탑을 거느리고 묵중하게 들어선 대웅전과 규모가 큰 천불전을 비롯하여 극락전.응진전.명부전.사명각.범종각.일주문.금강문. 사천왕문.천불선원과 요사체.명월료.청풍료.설법전.제하당. 남월료.만덕전등 65동의 전각이 들어서 있다.
선원의 연혁
사명(寺名)인 '직지(直指)'가 선의 본래 마음 자리를 가리키는 손짓인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직지사와 선의 관계는 불이적(不二的)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지사에 선맥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신라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직지사를 거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사격이 드높았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책의 암울한 기류속에서도 오히려 조정에서 직지사에 고선종대가람이란 첩문(帖文)을 내려 비호함으로써 많은 선지식인들이 대를이어 배출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끊일 듯하면 법맥을 이은 법계정심 스님이 이곳 황악산에 몸을 숨겼고, 세조대에 학덕겸전(學德兼全)의 고승으로 널리 알려진 동곡학조 스님이 이곳에서 선지를 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구국의 승병장이자 뛰어난 선승인 사명유정(1544-1610)스님이 이곳으로 출가해 신묵스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한때 주지를 맡기까지 했다.
1910년 직지사 염불회를 수선사(修禪社)로 개명, 여름과 겨울 안거시에 5-6명의 운수(芸水)가 입방하면서 근대 직지사 선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선종 고찰에 선원이 없어서는 안되겠다는 역사적 요청에 천불전 옆 천불암의 천불암 염불회를 고쳐 선원을 창설한 것이다. 동년 10월 서전(西殿)으로 선회를 옮겼으며, 1913년 봄에는 중앙사우(中央社宇)를 수리하고 선회를 다시 이전했다. 당시 참선 남자는 3명이었다. 직지사에서 1913년의 봄은 선원의 기틀을 본격적으로 다지는 의미 깊은 해이기도 하다. 그 해 당대의 뛰어난 선승 제산 스님이 해인사에서 직지사로 옮겨와 17년 동안(1929년까지) 천불선원의 조실로 머물면서 선원을 부흥시켜 직지사는 선본 총찰로서 잃었던 옛 영화를 다시 찿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퇴운.탄웅 같은 훌륭한 선사의 출현도 천불선원의 풍광을 드높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제산 스님을 종주로 삼고, 퇴운 스님을 화주로 삼아 비록 암묵열뇌(暗墨熱惱)의 일제 치하에서도 황악 일역에는 상연한 선풍이 드날렸던 것이다. 당시 선원은 비로전(천불전) 옆 명월료 자리에 위치했으며 선원의 이름은 천불선원이었다.
1915년 한국선의 큰 봉우리 경봉(鏡峰)스님이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수행하다가 직지사로 오는데 당시 천불선원에는 만봉(萬峰),남전(南展)스님이 머루르고 있었으며, 경봉 스님은 남전 스님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선 수행을 하였다. 활구선(活句禪)을 선양한 전강(田岡) 스님은 1918년 직지사로 와서 선방 남자들과 화두를 들다가 상기병을 얻어 목에서 피가 나고 나중에는 핏기마저 없을 정도로 정진을 감행.초견성(初見性)의 깨달음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1918년 자비보살 고암 스님은 제산 스님을 모시고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한철을 보냈으며 당시 30여 명의 납자가 안거중이었다. 1920년 당시에는 고해담 .이석암등 구참 수좌의 지도 아래 묵별 7일정진이라는 수행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많은 수선자들이 온 힘을 기울여 정진을 거듭했다. 1924년 4월 하안거부터 1926년 하안거까지 직지사에서 열린 3년 결사 때는 정화운동 당시 비구측의 종정을 맡았던 동산 스님이 참여하여 용맹정진 하였으며, 고암 스님도 1924, 25년에 천불선원에서 정진했다. 1926년에는 비구니 '성문'스님이 서전에서 선방을 열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1935년에 금오 스님이 직지사 조실로 주석하여 납자들을 제접했다. 1939년 하안거에는 탄용 스님이 조실로 머물렸으며 동안거 때는 박고봉.박금붕스님이 선댁 소임을 맡았다.
1940년, 50년대까지 납자들의 수행 정진이 끊이지 않았던 천불선원은 온돌 과열로 화재를 입어 전소되는 비운을 겪으면서 폐원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천불선원의 불행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58년 2월 녹원 스님이 직지사 주지로 들어서면서 대대적인 중창불사에 착수하면서 그 첫불사로 천불선원을 중건한 것이다. 사찰에는 우선 수선(修禪)할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당시 녹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온돌 과열로 대선실이 전소되고 그리하여 산새들은 아침저녁으로 빈터를 바라보며 울고 수선자들은 봄가을에 구름을 바라보며 탄식하는데 생각건대 선실 없는 선찰이 어디 있을 것이며 복전을 갈지 않고 무슨 불과를 얻을것인가." 이렇게 스님의 정성과 원력에의해 명월료 뒤편, 앞으로 물이 흐르고 좌우와 뒤로는 숲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인 길상지에 천불선원을 다시 세우게 되니, 1966년 4월에 착공하여 1971년 11월에 완공을 보았다. 현존하는 방명록 기록에 따르면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조실 고암 스님, 입승 영수스님의 8-9명의 납자가 정진하였고, 1981년부터 1982년까지는 조실 관응, 입승은 성광 및 원산 스님을 비롯하여 10여 명이 정진하다가 중단하였다. 1999년 여름 안거 때 선원을 다시 개원하여 한주 항전. 입승 대전 스님의 18명의 납자가 정진하였다.

선원의 현황 및 특징

향경다실은 선원내에 있는 요사체로서
스님들이 쉬는 지대방과 다각실이 있는 곳입니다.


극락전, 향경다실(香經茶室), 서상당(西上堂) 등이 들어선 천불선원 영역은 황악산에서 흘러 내리는 계류와 숲으로 둘러싸여 속기가 범접할 틈을 주지 않을 만큼 청정하다. 선원으로 들어서는 단 하나의 통로는 계류 위를 밟고 올라서 있는 도피안교를 지나는 길이다. 그 길로 10여미터쯤 가서 안양루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선면 깨끗하면서도 적정한 선원 일대가 한눈에 다가선다. 정면으로 극락전, 좌측으로 향경다실,우측으로는 동상당이 있으며 향경다실 뒤에 자그마한 서상당이 서 있다. 선원 큰방은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1971년에 공사비 5천만원을 들여 개보수하였고 1999년 봄에 참선 납자들이 수선할 수 있도록 개수하여 현재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천불선원 일원은 1971년 당시만 해도 한국 최대의 목조건물로서 극락전 큰방이 59.63평, 향경다실 36.81평, 동상당 55.65평,서상당 9.6평, 안양루가 11.32평 이었다. 적어도 500년이나 1000년쯤은 내다보고 국보급 목조건물 목록에 기록 되리라는 혜안을 가지고 지은 건물이다. 큰방은 정면 7간 측면 4간의 입공계 지붕으로 수용 인원은 20명이다. 입방 조건으로 비구만 받고 기초선원에 다니는 스님은 받지 않는다. 절에서는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공부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요 인물

(1)제산정원(1862~1930)


1862년에 합천 가야면 구원리에서 출생했다. 속성은 김씨며 법명은 정원이다. 1873년, 14세 때 해인사에서 우신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891년,30세에 발심하여 행각실에 올라 수월,천원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 경허 스님이 해인사 퇴설선원 조실로 있을 당시 원주 소임을 보면서 참선 정진 하였으며 이후 퇴설선원 조실로서 납자들을 제접했다. 법을 사명 스님의 적손인 우송 스님으로부터이었다. 제산 스님은 소년시절에는 탁주를 좋아하여 '탁백이'수좌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파격적인 납승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일에는 앞장서는 보살행으로 수좌들에세는 인기가 좋았다. 중년에 이르러 스님은 모범적인 수좌가 되었는데 발심하여 선방에 들어앉아 가부좌를 틀면서 계행도 엄정했다. 해인사에 있을 당시 경허 스님으로부터 "자네는 어디 가든지 50~60명의 수좌는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었던 스님은 1913년 봄, 41세 때 대중들을 이끌고 황악산 직지사로 향했다. 스님은 직지사 벽안당에 앉아 평생을 정좌불와하고 동구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서 천불선원 조실로서 후학들을 제접하는 등 수행에 매진했다. 그래서, 당시 교계에서는 제산 스님을 수행제일로 평했다. 한때 천불선원에 참선 정진했던 동광스님은 제산 스님이 용맹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본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0년 8월 24일 입적하니, 세수 69세, 법랍이 56년이었다. 입적에 들기전 문인 등이 물었다. "생이란 무엇입니까?" "본래 불생(不生)이거늘 어찌 죽음이 있겠는가. 바람이 고동치고 불이 바다밑을 태우니 천만고에 다만 이러할 뿐이로다." 스님은 이 말을 남기고 좌탈입망했다. 직지사에 '제산정원선사비"가 세워져 있다. 비명(碑銘)은 한암중원이 찬(瓚)했다.

(2)퇴운원일(1877~1939)


1877년 7월 27일 합천읍에서 태어난 퇴운 스님은 15세에 해인사로 들어가 우송 노사에게 축발하고 계를 받았다. 30세에 발심하여 행각을 떠나 정진하였으며 우송 스님의 법을이으니 제산 스님과는 법으로 문중 형제간이어서 같은 마음으로 서로 탁마하였다. 1916년 봄에 해인사에서 직지사로 옮겨와 선원에서 수행하면서 법화를 드날리며 공덕을 쌓는 동시에 1928년 봄에 법당과 요사 등의 번와 불사를 하고, 1939년 봄에 천불전 중수를 부촉하고 입적에 들었다. 세주 62세, 법랍은48년이었다. 평소 근검절약하며 상주들을 아끼고 보호하여 논 100여 석지기를 사들이니 그 세수(歲收)로서 선원의 살림이 풍족하였다 한다. 직지사에 '퇴운원일선사비'가 있다. 비명은 한암중원이 찬했다.

(3) 탄옹정혜(생몰연대 미상)


제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으며 직지사 천불선원 제산 스님 화상에서 참선 정진했다. 탄응 스님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좌선 정진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1933년 선학원 중앙선원 입승을 보며 정진했으며 1936년 오대산상원사슬련수련소에서 입승 소임을 보며 선원의 기강을 바로잡는 등 선풍 진작에 큰 공헌을 하였다.
탄응 스님은 1940년에 직지사로 와 납자들을 제접했으며 1941년 녹원 스님은 탄응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녹원 스님은 은사 탄응 스님을 회상하며서 이렇게 말했다. "탄응 스님은 말보다 행이 먼저였어요. 수행자는 언제나 하심(下心)하라고 가르치셨고 말을 많이 하면 실행하지 못하니 항상 과묵하라 하셨지요.. 스님의 행주좌와 어묵동성이 모두 선(禪)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한번은 추운 겨울날 화로를 지폈는제 화롯불을 쪼이시다가 참선살매에 드신 게예요. 화로의 잿불이 손에 닿아도 모르고 계셔서 흔들어 깨울정도였어요. 이처럼 무념무상 무욕의 자세로 살아가신 스님의 모습은 언제나 귀감이 됐지요." 한편 탄응 스님은 60때까지 상원사 선원에서 정진했던 듯하다. 당시 정진한 도반이었던 현 하계사조실 고송 스님의 말에 따르면, 탄응 스님을 지칭하여 "아주 보살이었어.그만한 중이없었어. 탄응 스님 상좌가 직지사의 관응 스님, 녹원 스님이야. 보살이라 상좌를 잘 뒀어."라고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4)관응지안(1910 ~ 2004)


스님은 1910년 9월 17일 경북 상주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전재영이며 법명이 혜응이고 법호가 관옹이다. 1929년 5월 12일, 상주 남장사에서 탄옹정혜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34년 유점사에서 대교를 마치고 1936년 3월 15일 선학원에서 일봉 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비구계를 수지했다. 1988년 동국대 전신인 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한 수 일본으로 도일, 1942년일본 용곡 대학을 졸업했다. 1959년 조계사 주지, 1961년 동국학원 이사를 역임했으며 1965년에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6년결사를 성만했다. 조계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비구.대처의 분규에 염증을 느껴 조용히 머물 곳을 물색하던중 찿은 곳이 천축사 무문관이었다. 스님은 6년 동안 완전히 외부와 차단되어 부처님의 6년간 설산 고행을 본받으면서 면벽참선했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어 박차고 나오는 것은 곧 자신의 거짓된 껍질을 완전히 부수어 내외가 명철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스님은 말했다. 또한 스님은 재가자들을 향한 법문에서 화두만이 견성의 길이 아니라고 했다. 어느 집이든 문이 있으면 들어가는 것이지 어느 쪽 문만 사용한다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 어느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현대불교신문> 에서 말한 적이 있다. 스님은 강사로서도 이름이 높아 김룡사 강원강사 이래 10여 년간 강사 생활를 했다. 특히 유식학에 조예가 깊다. 스님은 1980년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로 납자들을 제접했다. 1981년부터 82년까지 직지사 천불선원 조실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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