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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용문산에 위치한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10년(870) 두운 대사(杜雲大師) 에 의하여 개창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거대한 사찰 규모를 형성하였다. 즉 용문사는 직지사의 말사 가운데서 고려 왕조의 비호를 가장 많이 받아온 사찰이라 하겠다. |
그리하여 태조 19년(936) 에는 용문사를 크게 중창하여 주현(州縣)으로부터 매년 150석의 조세를 바치도록 하였다. 의종 19년(1165)에는 자엄(資嚴) 대사가 명을 받고 와서 조응(祖膺) 대사가 보시한 자량(資糧) 으로 3간 법당과 승방주고(僧房廚庫) 등 93소를 건립하였다. 또 명종 원년(1171) 에는 태자의 태(胎)를 일주문 밖의 봉두(峰頭) 에 묻고 사명을 용문산 창기사(昌期寺) 라 개칭하였다. 이에 성수(聖壽) 를 축원하는 법회를 열어 5명의 승려로 낮에는 <금광명경>을 전독(轉讀) 하고 밤에는 관음정근(觀音精勤) 으로써 항규(恒規) 로 삼았다. | ||
그리고 동왕 15년(1185) 에는 불사의 완공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지명(李知命) 찬의 중수비를 경내에 세웠다. 이 비에는 용문사의 삼이사(三異寺) 를 전하고 있는데, 그 첫째는 태조가 두운 대사를 찾을 때 진룡(眞龍) 이 출영(出迎) 한 것이라 하였고, 둘째는 처음 절을 지을 때 홀연히 고량상(古梁上) 에 무게 16냥이나 되는 은병이 출현하여 이 비용으로 절을 건립한 것이라 하였고, 셋째는 도량 남쪽의 청석탑에 사리를 안장할 때 오색 구름이 소반을 에워싼 것이라 하였다. |
그러다가 전각의 화재가 있었음인지, 이후 헌종 원년(1835) 에는 화재로 소실된 보광명전과 해운루를 중건하였으며, 1979년에는 대장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1984년 5월 9일 7시경 창고에서 발화하여 보광명전, 해운루, 응향각, 영남제일강원, 요사, 종무소 등 230평이 소실되는 참사가 있었다. 이때 진화과정에서 국내 유일의 국가지정 보물 목조건물인 대장전 및 윤장대(輪藏臺) 를 구제하기 위하여 그 사이에 있던 단하각(丹霞閣) 을 허물어 불길을 잡기도 하였다. 이후 복원과정에서 퇴락된 두운암(杜雲庵) 을 철거하여 그 목재 일부를 종무소 신축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
그러므로 용문사는 대웅전과 요사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전각이 맞배집 형식의 건물이라 하겠다. | ||
응진전 역시 정면 3간, 측면 3간의 맞배지붕 7평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塑造釋迦如來坐像, 80 X 63cm), 소조미륵보살입상(塑造彌勒菩薩立像, 106 X 27cm), 소조제화갈라보살입상(塑造提華竭羅菩薩立像, 106 X 27cm), 소조십육나한상(塑造十六羅漢像, 57 X 47cm)을 봉안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