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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번지에 위치한 희양산(曦陽山)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 대사(智證大師) 가 창건하였다. 또한 동왕 7년(881) 에는 정계(定界)의 표(標) 와 함께 봉암사(鳳巖寺) 라는 액(額) 을 사(賜) 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정계는 동쪽으로 구룡봉(九龍峰), 서쪽으로 오봉정(五峰頂), 남쪽으로 반야봉(般若峰), 북쪽으로 희양봉(曦陽峰) 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곳은 선문구산(禪門九山) 가운데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 으로서 더욱 잘 알려진 사찰이다. 사명을 봉암사라 한 것은 산상의 백운대에 소위 계암(鷄巖) 이라 불려지는 바위가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옛날 창사시에 닭이 그 바위 위에서 매일 새벽 시보(時報) 를 알려주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이로 인하여 절 이름이 봉암사(鳳巖寺) 가 되었다 한다. 또 <가람고(伽藍攷)>에는 신라 경순왕이 창건한 극락전이 있다 하였으며, 이는 경순왕이 피난할 당시의 원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오래지 않아 극락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전소되었으나 고려 태조 18 년(935) 정진 국사(靜眞國師) 가 재창하였다. <봉암사사적(鳳巖寺事蹟)>에 의지하여 역대의 중건.중수 사실을 적기하면 다음과 같다. |
<봉암사사실약록(鳳巖寺事實略錄)>에 따르면 정진 국사에 의한 중건 당시의 건물은, 대웅광명보전(大雄光明寶殿), 약사전(藥師殿), 설법전(說法殿), 관음전(觀音殿), 응진전(應眞殿), 금색전(金色殿), 지장전(地藏殿), 시왕전(十王殿), 극락전(極樂殿) 등 9전(九殿)과 동상실(東上室), 서상실(西上室), 내승당(內僧堂), 외승당(外僧堂), 내선당(內禪堂), 외선당(外禪堂), 동방장(東方丈), 서방장(西方丈), 좌시사(左侍事), 우시사(右侍事), 함허당(涵虛堂), 시자료(侍者寮), 중위당(中位堂), 해회당(海會堂), 성행당(省行堂), 연수당(延壽堂), 개료(皆寮) 등 무려 17료(寮)가 있었다 하며, 태양문(太陽門), 범종각(梵鐘閣), 만세루(萬歲樓), 세이루(洗耳樓), 희양원(曦陽院), 좌경루(左慶樓), 우경루(右慶樓), 동행랑(東行廊), 서행랑(西行廊), 서운루(棲雲樓), 서석루(西石樓), 안양문(安養門), 해탈문급곡루(解脫門及曲樓), 목욕실(沐浴室), 응향각 삼처(凝香閣三處), 봉로당 삼처(奉爐堂三處), 향적전(香積殿) 등 실로 방대한 전각을 소유하였음을 알게 한다. 산내암자 역시 남암(南庵), 서암(西庵), 동암(東庵), 백운암(白雲庵), 정토암(淨土庵), 백련암(白蓮庵), 환적암(幻寂庵), 원통암(圓通庵), 지장암(地藏庵) 등을 기록하고 있다. | ||
근래 봉암사는 1990년 2월 14일 밤 12시경 전기누전으로 108평의 선원 등 여러 건물이 소실되는 불행한 사태를 맞았다. 이에 주지 원행 화상(願行和尙) 은 봉암사 재건을 발원하고 바로 불사에 착수하여 1991년 4월 26일 선원 108평을 그대로 복원하였다. 대웅전은 1990년 6월 29일 금색전(金色殿) 으로 이전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8일 상량을 거쳐 1992년 6월 4일 준공 및 불상 점안식을 봉행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팔작지붕에 총 30평이며, 내부에는 근세 제작된 후불부조목각탱(後佛浮彫木刻幀, 600 X 1600cm) 을 봉안한 것이 특색이다. | |
극락전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원당(願堂) 으로 건립되었으며, 정면 1간, 측면 1간의 1층 목탑이었으나 현재는 2층 건물로 되었다. 상층 중앙부에는 석조의 넓은 노반(路盤) 과 보륜(寶輪) 을 설치한 탑형 건물이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상(56 X3 4cm) 과 극락회상도(199 X 186cm, 1904년) 를 봉안하고 있다. 삼성각은 정면 1간, 측면 1간의 맞배지붕이며, 내부에는 독성탱(105 X 100cm)과 산신탱(105 X 100cm) 을 봉안하였다. | ||
1992년 11월 2일 종각 준공 및 범종(1,000관) 타종식이 있었고, 같은해 11월 30일 조사전(25평) 을 준공하였으며, 또 12월 30일에는 성적당(惺寂堂, 94평) 및 수도 공사를 완공하였다. | |
이렇게 봉암사는 1989년부터 1993년에 이르는 동안 전답 약 60필지 27,000평의 매입과 함께 계곡을 정비하여 대지 약 6,000여 평을 확보하는 등 화재 이후 실질적인 중흥불사를 이룩하였다. |